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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로 국제 공인을 받은 7성 호텔인 밀라노 타운하우스 갤러리아. 모든 것을 최고급으로 제공한다는 이 호텔은 뉴스 토픽감으로 손색없다. 관련 잡지의 기사를 읽어내려가다가 이 호텔에서 사용되는 명품 목록에 눈이 멈췄다.

왜 관심을 갖느냐고? 그 목록 가운데 내가 가진 제품이 두개나 들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삼성전자 텔레비전이고, 다른 하나는 독일의 파버카스텔 연필이다. 안목 높은 전문가들로부터 최고 명품으로 인정받은 물건을 소유한 기쁨을 우회적으로 확인했다고나 할까. 실제 사용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 타운하우스 갤러리아를 찾을 명분 하나는 건졌다. 이유야 어떻든 밀라노에 다시 가보고 싶어 마음은 즐겁다.

독일의 파버카스텔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연필 회사다. 현재 쓰고 있는 육각 연필을 최초로 디자인한 공로는 빛나는 업적의 출발이다. 재료로 소모되는 나무보다 더 많은 양을 직접 재배하는 환경친화적 생산방식을 시도한 회사도 파버카스텔이다. 전 세계 여러 곳에 공장이 퍼져 있지만 똑같은 원칙을 고수하고, 이제 연필뿐 아니라 명품 필기구를 만드는 관록의 브랜드이다. 최고의 호텔이 선택한 최고의 필기구엔 충분한 이유가 있다.

2006년 여름 뉘른베르크 스테인에 있는 본사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파버카스텔은 수백 년 된 고성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제2차가 세계대전 중 연합군의 프레스센터로 쓰였던 역사적 건물이기도 하다. 연필 하나로 귀족 작위를 받은 파버 카스텔가의 자부심과 전통으로 지켜온 성은 명예의 상징으로 우뚝 섰다.

성과 연결된 공장에선 평생 연필만을 만들어온 장인들이 일한다. 자신이 만든 연필이 인류 문화에 기여한다는 그들의 자부심은 아름다웠다. 최종 검수를 맡은 아주머니는 30년 이상 한자리에 앉아 불량품을 어김없이 골라낸다. 작은 연필 속에 녹아 있는 인간의 존재를 느끼는 일은 물건 이상의 가치로 증폭되어 숙연하게 다가온다.

파버카스텔의 고급 라인인 그라폰파버카스텔의 퍼펙트 펜슬은 내 작업의 중요한 도구다. 연필은 아무래도 나무로 만든 것이어야 제격이란 믿음, 아울러 휴대 문제까지

해결한 편의성, 부드럽게 써지는 필기감, 은은한 금속광채의 기품 등 모든 것이 만족스럽다. 단순해 보이는 연필엔 250년에 가까운 시간이 농축되어 있다. 일회성의 경박한 시대에 전통을 지닌 영속의 물건은 묵직한 존재의 무게로 화답한다.

시간과 품질이 만들어낸 명성은 진정 좋은 것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몫이다. 멀리 위대한 문호 괴테, 빈센트 반 고흐, 케네디 대통령이 애용하던 연필. 최근엔 유럽의 귀족과 국제적 명망가들의 애장품이 된 파버카스텔이다. 퍼펙트 펜슬을 사용하면서 이들과 같은 반열에 오르고 싶은 내재된 욕망을 무수히 최면 걸었다.

무릇 좋은 물건의 효용성은 그것으로 무엇을 만들 수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물건만으로 생명이 담기지는 않는다. 생명을 부여하는 일은 사용자 몫이다. 일상을 흘려버리지 않는 메모 습관을 들여준 파버카스텔은 더 좋은 글이 쓰일 때 빛난다. 물건은 자신을 위하고 세상을 이롭게 하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을 곁들일 때 비로소 살아난다.

품격이란 쉽게 복제되지 않는다. 누구나 만들 수 있는 물건에 격이 깃들 여지는 없다. 명품은 그를 지닐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만 비밀을 알려준다. 진정한 가치는 지향의 극점을 향하는 인간정신인 것이다. 최고의 물건을 동경하고 사용한다는 것은 더 높은 세계와 경지를 자각하려는 의식의 환기일지 모른다. 명품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찾아내 자신에게 이식하는 행동은 삶의 큰 울림으로 되돌아온다.


-글 윤광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