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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한번쯤 가보고 싶은 도시 일순위에 오른다는 이탈리아 피렌체. 쫓기듯 스치는 관광객의 눈으로는 건물 외형만 보고 오기 쉽상이다. 이 도시에선 적어도 일주일 이상 머물러야 한다. 오래된 도시의 전통이 주는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한 최소한의 시간이다.

피렌체에 널려 있는 수많은 유적은 박제된 과거가 아니다. 피렌체 사람들은 도시의 자부심을 통해 현재를 이야기한다. 전통을 살아 숨 쉬게 하고 재창조하는 능력 때문이다. 여기서 만들어지는 비스콘티 만녀닐에서 피렌체의 저력을 보았다면 과장일까.

비스콘티, 필기구 수집가인 단테 베키오와 루이지 폴리가 디지털시대에 설립한 신생 만년필 제조사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필기구를 제 손으로 만들겠다는 피렌체인의 각오는 현실이 되었다. 필기구 수집가가 세운 만년필 회사, 뭔가 다르지 않다면 존재 이유는 없다.

비스콘티엔 기존 명품 만년필을 뛰어넘는 아름다운 색채가 담겨 있다. 엄숙과 권위 대신 자유와 창의의 에너지가 넘친다. 몸체는 아름다운 색채 실현을 위해 필름 재료로 쓰이던 셀룰로이드를 선택했다. 색상의 느낌과 깊이를 잘 표현하고 내구성 측면에서 유리한 소재란 게 이유다. 여기에 피렌체의 전통 장인들이 기예를 더해 수공으로 펜촉을 만든다. 외형의 수려함과 필기 감촉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으니 차별의 성과는 이룬 셈이다.

피렌체의 분위기가 연상되는 신비한 색감과 재질의 독특함, 르네상스시대의 풍요를 담은 듯한 절묘한 선의 포름(fome). 만년필에서 읽히는 상징은 피렌체와 비스콘티를 떼어놓고 생각하지 못한다. 비스콘티는 곧 피렌체이자 피렌체 사람의 풍요를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이렇게 멋진 자태의 만년필을 보고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면 감성이 건조한 탓일 게다.

견물생심이다. 녹황색의 비스콘티를 샀다. 엄청난 가격대의 더 좋은 만년필이 즐비하다. 하지만 나의 선택은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을 모티프로 만들었다는 \'고흐 시리즈\'다. 불우했던 천재 화가의 불안한 열정과 광기의 에너지를 닮고 싶은 마음에서다. 나같이 게으른 예술가가 위대한 천재의 에너지를 훔쳤다 해서 흉이 되진 않을 것이다.

마블과 같은 만년필 표면의 색채에서 고흐가 후기의 걸작 <까마귀가 나는 밀밭>을 그렸던 파리 북쪽 오베르의 풍광을 떠올렸다. 녹색, 붉은색, 청색, 검정…. 어떤 것을 집어들어도 휘몰아치는 고흐의 강렬한 열정을 느끼게 된다. 일일이 손으로 만든 비스콘티의 매혹적 색채는 고흐의 그림처럼 단 하나뿐이다. 아름다움은 시간을 초월해 화가의 열정을 되살렸다.

비스콘티는 과거에만 매달리지 않는다. 이들이 만드는 \'시티 시리즈\'는 도시의 특징적 이미지를 만년필에 담고 있다. 맨해튼의 마천루 야경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뉴욕\'은 그 어느 만년필보다 아름답다. 인간의 상상력은 고갈되지 않는 에너지란 생각을 들게 하는 물건이다.

비스콘티의 사장은 한국을 이미지화한 만년필도 만들고 싶다 했다. 세계에 통용되는 우리의 상징은 무엇일까. 과거의 전통과 문화 아니면 현재의 모습? 언뜻 떠오르지 않는다. 있다하더라도 자신이 없다. 상징이 빈약한 사회와 국가는 창의적 에너지가 떨어진다. 상징의 이미지가 무한한 부가가치를 지닌 자산임을 정작 우리는 잘 모른다.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가 자신의 프로그램에 비스콘티 만년필을 들고 나와 자랑하는 장면을 보았다. 그녀는 단순히 물건을 들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상징의 가치가 얼마나 증폭될 수 있는지를 말하고 있다. 세계적 명사는 스스로 인정한 비스콘티의 의미가 어떻게 읽힐지 아는 사람들이다.


-글 윤광준